■ 동생의 손에 이끌려 한의원을 찾은 65세 여성
윤*리 님은 올해 60대 여성이다.
살집이 있고 넉넉한 인상을 가진 분으로, 동생의 소개로 한의원을 찾아왔다.
진료를 하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12년 전 자녀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아픔이 있었다.
그 일을 겪은 뒤로는 육체적인 고통이든 정신적인 고통이든 모든 것에 대해 둔감해졌다고 했다.
몸이 아프고 불편해도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고 한다.
20여년을 종아리가 시리고 발뒤꿈치가 아파도 그저 참고 지냈다.
그런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던 동생이 참다못해 언니를 데리고 한의원에 온 것이다.

■ 20년간 지속된 종아리 냉증과 5개월 전 시작된 발뒤꿈치 통증
환자의 가장 오래된 증상은 20년 전부터 지속된 종아리 냉증이었다.
계절과 관계없이 종아리가 늘 시렸다고 했다.
여기에 5개월 전부터는 발뒤꿈치 통증까지 생겼다.
여행을 가서 평소보다 많이 걸은 뒤로 발뒤꿈치가 아프기 시작했는데,
통증이 계속되어 이제는 동네 산책조차 어려울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도 환자는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 얼굴에는 열이 나고 땀이 흐르는데 배는 항상 차가웠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증상이 있었다.
얼굴에는 열이 자주 오르고 땀이 많이 나서 화운데이션조차 제대로 바르기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배는 항상 차가웠다.
상체에는 열이 오르는데 복부와 다리는 차가운 상태였다.
한의학에서는 이러한 증상 양상을 상열하한(上熱下寒)이라고 표현한다.
쉽게 말하면 몸의 위쪽에서는 열감을 느끼지만 아래쪽에서는 냉감을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환자는 평소 고혈압과 고지혈증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 진맥으로 살펴본 오장육부의 불균형
진맥을 해보니 한의학적으로 태음인 체질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오장육부의 상태를 세밀하게 살펴보니 폐와 비장의 기운은 허하고,
심장과 간장, 신장의 기운은 상대적으로 실한 상태였다.
나는 이 환자의 경우 신장의 기운이 지나치게 실한 상태가
하체의 냉증과 관련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환자가 호소하는 얼굴의 열감과 땀, 차가운 복부,
20년간 이어진 종아리 냉증을 이러한 관점에서 함께 살펴보았다.
■ 오장육부의 균형을 고려한 사암 오행침 치료
진맥 결과에 따라
태백혈과 태계혈은 보하고, 소충혈과 후계혈을 사했으며,
대돈혈과 음곡혈도 사하는 방식으로 침을 놓았다.
사암 오행침은
한의학의 음양오행 이론을 바탕으로 오장육부의 허실을 판단하고,
그에 맞는 경혈을 선택해 치료하는 침법이다.
진맥을 통해 파악한 오장육부의 허실과 몸 전체의 균형을 고려해 침 치료를 진행했다.
■ 침을 맞고 걸어 나오는데 발뒤꿈치가 아프지 않다고 했다
환자가 침을 맞고 침구실에서 걸어 나오면서
뒷꿈치 통증과 다리 시른 느낌을 못끼고 걷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평소와 다른 느낌에 놀란 듯했다.
물론 침 치료 직후 증상이 줄었다고 해서
오랫동안 이어진 냉증과 발뒤꿈치 통증이 완전히 치료되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앞으로 증상이 다시 나타나는지, 걷는 데 불편함이 없는지 경과를 확인해야 한다.
다만 오랫동안 불편함을 안고 살아온 환자가
침 치료 직후 이전과 다른 몸의 변화를 느꼈다는 사실은 임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경험이었다.

■ 아픈 몸을 돌볼 마음조차 잃어버렸던 환자를 생각하며
사람은 몸이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때로는 마음에 남은 깊은 상처 때문에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조차 뒤로 미루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번 환자도 그런 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의사로서 내가 할 일은 아픈 부위를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환자가 어떤 시간을 살아왔고,
어떤 몸 상태로 지금까지 버텨왔는지를 함께 살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침 치료 후 느꼈다는 변화가 일시적인 반응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좋은 경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