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공기 덕분에 천천히 걸을 수 있었던 날
장○란 할머니는 올해 여든여덟이셨다.
이틀 전, 필요한 서류가 있어 동사무소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집에서 동사무소까지는 걸어서 20분 남짓이었다.
작년 가을은 유난히 비가 잦아 마치 장마처럼 느껴졌는데,
그날만큼은 하늘이 맑고 공기가 좋아
산책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서류 몇 가지를 발급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공원 입구에서 마주한 낯익은 얼굴
동사무소 근처 공원 입구에서 낯익은 두 분을 보았다.
우리 아파트에 사시고,
우리 한의원의 환자이신 팔십대 할머니 두 분이었다.
두 분은 나란히 앉아 잠시 쉬고 계셨다.
‘기억을 하실까…’ 하는 마음이 들어
조심스럽게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한 분이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시더니
“얼굴이 낯이 익은데… 누구신가?” 하고 물으셨다.
한의원 원장이라고 말씀드리자
두 분 모두 환하게 웃으며 바로 알아보셨다.
두 분도 집에서 걸어서 동사무소에 들렀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젊은 사람에게도 만만치 않은 거리였고,
팔구십 노인의 걸음으로는
아마 한 시간이 훌쩍 넘을 거리였다.

걸음 하나 하나에도 많은 시간이 담겨 있다
작년에 넘어지셔서 허리에 어혈이 들었던 일은
요즘은 어떠신지 여쭈었다.
뼈가 부러지지 않은 어혈은
정형외과에서는 진통제 말고는
마땅한 치료 방법이 없는 경우가 많다.
진통제는 통증을 잠시 눌러줄 뿐,
어혈을 풀어주는 치료는 아니다.
어혈이 풀리지 않으면
수십 년이 지나도 후유증으로 남을 수 있다.
그때 아드님께서 전화로 문의를 주셔서
한약을 달여 아파트까지 직접 배달해드린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시다시피, 그때 약 먹고 지금은
후유증 없이 잘 걸어 다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괜히 마음이 놓였고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픈 경우도 있다
함께 계시던 또 다른 한 분은
자유분방한 손녀 문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셔서
울화병 증상이 심해
몇 차례 치료를 받으셨던 분이었다.
말씀을 듣다 보니
‘참 속상하시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몸이 아픈 것도 힘들지만,
마음이 쌓여 아픈 것은
어르신들께 더 큰 짐이 되곤 한다.

치료라는 이름의 인연은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가을 햇살 아래
공원 입구에 나란히 앉아 계신
두 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치료란 결국
약 하나, 침 한 번을 넘어
이렇게 삶의 길 위에서
다시 만나 이어지는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그래도 끝까지 걸어가고 계신 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은 하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