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쟁터에서 마주한 안타까운 현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1592~1598)을 비롯해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적군을 피해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그런데 어린 아기를 데리고 피난하는 부모들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큰 두려움이 있었다.
바로 아기의 울음소리였다.
피난길에서 아기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면
그 소리가 적군에게 들릴 수 있었고,
자칫하면 가족 모두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아기를 데리고 피난 행렬에 섞이지 못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어린 자식을 길에 두고 떠나야 하는
가슴 아픈 일까지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허준은 선조의 어의로서 전쟁 중 왕실과 관리들의 피난길에 동행하면서
이러한 모습을 직접 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병을 치료하는 의원이었던 허준에게도
어린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현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 아기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 사용한 감초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허준의 일화가 있다.
아기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 허준이 사용했다는 방법은 바로 감초(甘草)였다.
감초를 달인 물을 솜으로 만든 작은 공에 적셔 아기의 입에 물려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감초는 특유의 단맛이 있어
아이들이 비교적 거부감 없이 빨 수 있는 약재이다.
한의학에서도 오래전부터 여러 처방에 널리 사용되어 온 약재이기도 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서는
이렇게 감초를 적신 솜을 아기에게 물려주어 울음을 달래고,
피난길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크게 퍼지는 것을 줄이고자 했다고 한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영유아에게 무엇인가를 입에 물리는 방법은 안전상의 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현대의 육아법이나 치료법이라기보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어린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고안했다고 전해지는
옛 의학적 지혜의 한 사례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 허준은 단순히 병만 고치는 의원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가 인상적인 이유는 감초라는 약재 자체에만 있지 않다.
허준은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아기를 데리고 피난하는 부모들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어린 생명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다.
의원에게 필요한 것은 병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술만이 아니다.
환자가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지, 무엇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지,
그 사람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마음도 중요하다.
허준이 오늘날까지 위대한 의성(醫聖)으로 기억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의학을 단순한 기술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사람의 생명과 삶을 함께 바라보았다.

■ 동의보감에 담긴 허준의 마음
허준이 남긴 《동의보감》은 우리에게 수많은 질병과 치료법을 알려주는 의학서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단순한 의학 지식만은 아니다.
사람의 몸을 이해하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치료하고,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한 의사의 오랜 경험과 생각이 담겨 있다.
전쟁 중 아기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 감초를 활용했다는 이야기도
그가 사람의 삶을 얼마나 세심하게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로 전해진다.
전란의 긴박함 속에서도 생명을 먼저 생각했던 허준.
그가 남긴 《동의보감》뿐만 아니라 사람을 헤아리고
생명을 소중히 여겼던 마음까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의술의 출발점에는 결국 사람이 있다.
그리고 좋은 의사는 병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병을 가진 한 사람의 삶까지 바라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허준의 이야기를 돌아보며
나 역시 진료실에서 환자의 증상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